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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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羅蕙錫, 1896년 4월 18일 - 1948년 12월 1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일제 강점기와 한국의 화가이자 작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여자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뒤 1918년 귀국하여 화가,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하였다.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남편 김우영을 따라 만주와 프랑스 등에 체류하던 중 프랑스에서 외교관 최린과의 염문으로 이혼하였다. 언론, 작품활동 외에 소설가와 시인, 교육자로도 활약했으며, 한국의 초기 여성 서양화가의 한사람으로 유명하였다. 처음 이름은 아지(兒只), 자는 명순(明順), 호는 정월(晶月)이다.
어록
[편집]-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진리도 아니고 오직 취미일 뿐이다.
-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 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을 장려한 것이다.[1]
-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2]
- 내 몸이 제일 소중하다.[3]
- “여자도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4]”
- '여성도 인간이외다[5]'
- "조선여자도 사람될 욕심을 가져야겠소.[6]"
- “남자들은 왜 여자한테만 정조를 요구하고 자신들은 정조를 지키지 않는가.[4]”
- …과연 내 생활 중에서 그림을 제해 놓으면 실로 살풍경이다. 사랑에 목마를 때 정을 느낄 수도 있고, 친구가 그리울 때 말벗도 되고, 귀찮을 때 즐거움도 되고, 괴로울 때 위안이 되는 것은 오직 이 그림이다.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 그림과 나를 따로따로 생각할 수 없는 경우에 있는 것이다.
- 1926.05.20. 조선일보
- 기교만 조금씩 진보할 뿐 정신적 진보가 없어 나 자신을 미워할 만큼 괴롭다.[7]
- "여자도 인간이다. 남자는 정조를 지키지 않으면서 여자에게만 정조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8]"
- 한국 남자들은 자기 아내와 어머니, 누이, 딸은 깨끗하고 한 남자만을 바라보기를 바라면서, 남의 여자에게는 욕정을 품고 음란함을 강요한다.
- 정조는 취미에 불과하다[9]
- 내가 순결하지 못하면 남이 순결하지 못하고, 정조를 잃은 것도 충분히 존중해야 되는게 당연한 것 아닌가?
- '돈 업스면 이태리니 불란서니 어대어대를 다 엇더케 다녀 왓스랴[10]'
- 양부현부(良夫賢父)의 교육법이 없는 양처현모(良妻賢母)의 교육법은 여자에 한하여 부속물(附屬物)된 교육주의이다.[11]
- "변치 않는 사랑을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는 함께 살지 않을 것![2]"
- 사람이면 다 존귀하다[12]
- “자기를 잊지 않고서야만 남을 진심으로 사랑할 것이요, 자기를 잊지 않고서야만 여자의 자유평등이 있을 것이요.[13]”
- 인간에게는 영과 육이 있다. 사랑이란 영과 육이 합일될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 내가 여자요, 여자가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내가 조선 사람이오, 조선 사람이 어떻게 해야할 것을 알아야겠다.[11]
- 1917년 '학지광'에 게재한 '잡감'(雜感)-K언니에게
-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다.
-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경험이다.[14]
- '정조는 단지 취미의 문제[15]'
-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때문에 내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16]'
- '결혼한 후에 다른 남자나 여자와 좋와 지내면 부도덕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자기 남편과 더 잘 지낼수있게 하는 활력을 얻는다.[16]'
- '나는 결코 내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이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 믿었사외다. 구미 일반 남녀 부부 사이에 이러한 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또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오. 남편이나 본부인을 어떻게 하지 않는 범위 안의 행동은 죄도 아니요 실수도 아니라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만 할 감정이라 생각하오![17]'
-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합니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18]
- '모성애는 후천적인 것이다.[15]'
- "(임신이란) 그런 중에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움직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이 오싹해지고 가슴에서 무엇인지 떨어지는 느낌이다.[19]"
-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 없는 것을 이해해야 된다.
- 세상의 모든 신용을 잃고 모든 공분 비난을 받으며 부모 친척의 버림을 받고 옛 좋은 친구를 잃은 나는 물론 불행하려니와 이것을 단행한 씨(김우영)에게도 비탄, 절망이 불소할 것입니다.[20]
- "여성이라고 해서 임신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모성애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19]"
-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강요된 결과물이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 "현부양부(賢父良夫)의 교육법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현모양처란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21]"
- "지금 이 길을 걷는 나는 희생되겠지만 미래의 여인들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 (최린을).. 나도 퍽 흠선(欽羨)했다.[11]
- 1929년 ‘별건곤(別乾坤)’과 인터뷰에서
- 나는 세상과 사회의 지탄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길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 "여자도 인간이다. 남자는 정조를 지키지 않으면서 여자에게만 정조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22]"
- "구미 만유기 일 년 팔 개월 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얏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켓치 빡스를 들고 연구소를 다니고 책상에서 불란서 말 단자(單字)를 외우고 때로난 사랑의 꿈도 뀌여 보고 장차 그림 대가가 될 공상도 해보앗다. (중략) 실상 조선 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상 아모 장애되난 일이 하나도 업섯다.[23]"
-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 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에게 정조를 유인(誘引)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愛好)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11]
- 내 순결을 유린한 데 대한 위자료를 달라!
- 1931년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소송을 하면서
-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한다.[24]"
- "과연 내 생활 중에서 그림을 제해 놓으면 실로 살풍경이다. 사랑에 목마를 때 정을 느낄 수 있고(…) 괴로울 때 위안이 되는 것은 오직 그림이다.[2]"
- "나는 결코 내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이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 믿었사외다. 구미 일반 남녀 부부 사이에 이러한 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또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오. 남편이나 본부인을 어떻게 하지 않는 범위 안의 행동은 죄도 아니요 실수도 아니라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만 할 감정이라 생각하오.[17]"
- "내 갈 길은 내가 찾아 얻어야 한다.[24]"
- "나는 거짓말을 하면서 남에게만 착하고 진실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어냐?"
- "명절은 남자들에게는 공휴일이지만 여자들에게는 피로하고 고단한 날이다."
-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요, 오직 취미"
- "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이하 중략)... 노라를 놓아라 순순히 놓아다고 높은 담벽을 헐고![4]"
- "조선 남성들은 이중적인 정조 관념을 가졌다. 자기 아내와 어머니, 누이, 딸은 정조를 지키기를 바라면서 남의 여자의 정조는 빼앗아 즐기기를 원한다."
- 과연 모든 여성은 모성을 지니고 태어나는가 아니면 학습되는 것인가. 모성이라는 이름아래 어머니는 수많은 희생을 감내한다. 그러나 이 '모성애'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학습되는 경향이 있다.
- "오직 기생 세계에는 타인 교제의 충분한 경험으로 인물을 선택할 만한 판단의 힘이 있고 여러 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람을 좋아할 만한 기회가 있으므로… 조선여자로서 진정의 사랑을 할 줄 알고 줄 줄 아는 자는 기생계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25]"
-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이나 도쿄 사람쯤만 되더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26]"
- 나의 사랑하는 4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거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에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송이 꽂아다오.
- 1935년,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중에서
- 하루를 살더라도 참되고 진실한 삶을 살자.
- 잠 없고는 살 수 없다. 이런 것을 탈취해가는 자식이 생겼다 하면 이에 더한 원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 정의한다.
- 어머니된 감상기 中
- 사는 것은 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는 것이야.
- 신생활에 들면서 중에서
외부 링크
[편집]- ( 시(詩)가 있는 아침 ) - 노라
- 첫 근대여성화가 나혜석 회고전 중앙일보 2002.02.25
각주
[편집]- ↑ 나혜석은 어떻게 금기를 깼나 한겨레 2008.10.10
- ↑ 2.0 2.1 2.2 신여성 나혜석 결혼조건은 “그림 그리는 것 방해 말 것” 중앙일보 2008.03.07
- ↑ [야!한국사회] 연예가 결별 괴담, 남 일이다 한겨레 2007.10.29
- ↑ 4.0 4.1 4.2 불꽃의 여자 나혜석 조선일보 2000.11.01
- ↑ 첫 근대여성화가 나혜석 회고전 중앙일보 2002.02.25
- ↑ "절반의 몫을 찾자" 인습의 굴레 벗어 조선일보 1999.12.28
- ↑ 1921년 첫 여성서양화가 나혜석 데뷔展 동아일보 2005.03.18
- ↑ '불꽃의 여자 나혜석' 산울림 장기공연 중앙일보 2002.02.23
- ↑ 시대에 도전한 신여성 나혜석의 삶 중앙일보 2007.06.27
- ↑ '벌거벗고 뛰는 낭자' 조선 역관이 본 이것은? 조선일보 2011.07.09
- ↑ 11.0 11.1 11.2 11.3 [다시 읽는 여인열전] 남성중심 사회서 희생된 나혜석 조선일보 2002.09.10
- ↑ 나혜석의 껍데기만 보지 마라 조선일보 2008.02.22
- ↑ 참고 살면 볕들날 온다? 조선일보 2004.12.27
- ↑ 내 수첩을 공유합니다 한겨레 2012.02.03
- ↑ 15.0 15.1 이상경씨 '나혜석 전집', 평전 '나혜석' 발간 한겨레 2000년 01월 31일자
- ↑ 16.0 16.1 가출신여성 이야기 조선일보 1999.11.25
- ↑ 17.0 17.1 “엄마는 희생당한 선각자란다” 양성평등 사회 꿈꾼 나혜석 중앙일보 2009.05.08
- ↑ 30년대 조선을 거닐다 <9> '모던 걸'의 비극적 결혼 조선일보 2005.12.02
- ↑ 19.0 19.1 [이영아의 여론女論] 모성애는 의무가 아니다 중앙일보 2011.10.13
- ↑ 나혜석 이혼…여권의식 불당겨 (1931년) 조선일보 1999.04.13
- ↑ 20. 新여성-욕망이냐 현모양처냐(허동현 교수) 중앙일보 2003.06.26
- ↑ '불꽃의 여자 나혜석' 장기공연 중앙일보 2002.02.25
-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글항아리 펴냄, 2011) pp.318
- ↑ 24.0 24.1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요, 오직 취미"
- ↑ [인문사회]‘꽃을 잡고’… 기생, 시대를 앞서간 슬픈 영혼 동아일보 2005.06.04
- ↑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外 중앙일보 2008.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