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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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마오쩌둥(중국어 간체: 毛泽东, 정체: 毛澤東, 병음: Máo Zédōng, 1893년 12월 26일 ~ 1976년 9월 9일)은 중국의 정치가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초대 주석이 되었다.

어록[편집]

  • 革命不是请客吃饭,不是做文章,不是绘画绣花,不能那样雅致,那样从容不迫,文质彬彬,那样温 良恭俭让。革命是暴动,是一个阶级推翻一个阶级的暴烈的行动。
    • 혁명은 손님을 청해 밥을 먹는 것이 아니고 글을 짓는 것이 아니고 그림을 그리고 꽃수를 놓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우아하고 침착하고 문질빈빈하며, 온화하고 선량하고 공경하고 절약하고 겸양해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혁명은 폭동이다. 한 계급이 또 다른 계급을 뒤엎는 격렬한 행동이다.
    • 〈후난농민운동고찰보고〉(1927년 3월)
  • 在阶级社会中,每一个人都在一定的阶级地位中生活,各种思想无不打上阶级的烙印。
    • 계급사회에서 사람마다 모두 특정한 계급적 지위 속에서 살고 있고, 어떤 사상이든 계급의 낙인을 찍지 않은 것이 없다.
    • 〈실천론〉(1937년 7월)
  • “战争是政治的继续”,在这点上说,战争就是政治、战争本身就是政治性质的行动,从古以来没有不带政治性的战争。
    • ‘전쟁은 정치의 계속이다.’ 이 점에서 말하면 전쟁이 바로 정치이고, 전쟁 자체가 바로 정치적 성격을 가진 행동이다. 예로부터 정치성을 띠지 않은 전쟁이란 없었다.
    • 〈지구전을 논함〉(1938년 5월)
  • 每个共产党员都应懂得这个真理:“枪杆子里面出政权”。
    • 공산당원마다 모두 이 진리를 알아야 한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 〈战争和战略问题〉(1938년 11월 6일)
  • 我们的原则是党指挥枪,而决不容许枪指挥党。
    • 우리의 원칙은 당이 총을 지휘하는 것이고, 총이 당을 지휘하는 것을 절대 용인하지 않는다.
    • 〈战争和战略问题〉(1938년 11월 6일)
  • 人总是要死的,但死的意义有不同。中国古时候有个文学家叫做司马迁的说过:“人固有一死,或重于泰山,或轻于鸿毛。”为人民利益而死,就比泰山还重;替法西斯卖力,替剥削人民和压迫人民的人去死,就比鸿毛还轻。
    • 사람은 어쨌든 죽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의미에는 다름이 있다. 중국의 고대에 사마천이라는 문학가가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데, 그 죽음에는 태산보다 무거운 것도 있고, 기러기 털보다 가벼 운 것도 있다”고 말했다. 인민의 이익을 위해 죽으면 태산보다 무거운 것이지만 파쇼 대신 애쓰고, 인민을 착취하고 압박한 사람 대신 죽으면 기러기 털보다도 더욱 가벼운 것이다.
    • 〈为人民服务〉(1944년 9월 8일)
  • 人民、只有人民,才是创造世界历史的动力。
    • 인민, 인민이 있어야만 세계 역사를 창조하는 동력이 생긴다.
    • 〈연합정부론〉(1945년 4월 24일)
  • 一切反动派都是纸老虎。看起来,反动派的样子是可怕的,但是实际上并没有什么了不起的力量。从长 远的观点看问题,真正强大的力量不是属于反动派,而是属于人民。
    • 모든 반동파는 모두 종이호랑이이다. 반동파의 모습이 무서워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결코 무슨 대단한 힘은 결코 없다. 긴 안목으로 문제를 보면 진정 센 힘은 반동파가 가진 것이 아니라 인민이 갖고 있다.
    • 〈미국 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과의 대화〉(1946년 8월)
  • “精兵简政”。讲话、演说、写文章和写决议案,都应当简明扼要。会议也不要开得太长。
    • ‘군대를 정예화하고 행정 기구를 간소화한다.’ 강연, 연설, 문장 쓰기와 결의안 쓰기는 모두 간단명료하게 해야 한다. 회의도 너무 길게 열지 말라.
    • 〈당위원회의 업무방법〉(1949년 3월 13일)
  • 今天,世界战争的危险和对中国的威胁主要来自美国的好战分子。他们侵占中国的台湾和台湾海峡,还想发动原子战争。我们有两条:第一,我们不要战争;第二,如果有人来侵略我们,我们就予以坚决回击。我们对共产党员和全国人民就是这样进行教育的。美国的原子讹诈,吓不倒中国人民。我国有六亿人口,有九百六十万平方公里的土地。美国那点原子弹,消灭不了中国人。即使美国的原子弹威力再大,投到中国来,把地球打穿了,把地球炸毁了,对于太阳系说来,还算是一件大事情,但对整个宇宙说来,也算不了什么。
    • 오늘날 세계전쟁의 위험과 중국에 대한 위협은 주로 미국의 호전광에서 나온다. 이들은 중국의 대만과 대만해협을 침공하고 원자전쟁도 벌이려 한다. 우리는 첫째, 우리는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만약 누군가가 우리를 침략한다면 단호히 반격할 것이다. 우리는 공산당원과 전 국민에게 이렇게 교육을 한다. 미국의 원자 공갈은 중국 인민을 놀라게 할 수 없다. 우리 나라는 인구가 6억 명이고, 960만 평방킬로미터의 땅이 있다. 미국의 그 정도의 원자탄으로는 중국인을 소멸시킬 수 없다. 미국의 원자탄 위력이 커서, 중국에 투하되어 지구를 뚫거나 지구를 폭파시키더라도, 태양계로서는 큰 일이지만 우주 전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 〈原子弹吓不倒中国人民〉 (1955년 1월)
  • 百花齐放、百家争鸣的方针,是促进艺术发展和科学进步的方针,是促进我国的社会主义文化繁荣的 方针。艺术上不同的形式和风格可以自由发展,科学上不同的学派可以自由争论。利用行政力量,强制推行 一种风格,一种学派,禁止另一种风格,另一种学派,我们认为会有害于艺术和科学的发展。艺术和科 学中的是非问题,应当通过艺术界科学界的自由讨论去解决,通过艺术和科学的实践去解决,而不应 当采取简单的方法去解决。
    •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은 예술 발전과 과학의 진보를 촉진시키는 방침이고, 중국의 사회주의 문 화예술을 촉진시키는 방침이다. 예술적으로 다른 형식과 풍격은 자유로이 발전해도 되고, 과학적으로 다른 학파가 자유로이 논쟁해도 된다. 행정력을 이용해 강제로 풍격 한 가지, 학파 한 갈래를 밀고 또 다른 풍격과 학파를 금지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예술과 과학의 발전에 유해할 수 있다고 여긴다. 예술과 과학 속의 시비문제는 반드시 예술계와 과학계의 자유 토론을 통해서 해결하고, 예술과 과학의 실천을 통해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간단한 방법을 갖고 해결해서는 안 된다.
    • 〈关于正确处理人民内部矛盾的问题〉(1957년 2월 27일)
  • 为了同敌人作斗争,我们在一个长时间内形成了一个概念,就是说,在战略上我们要藐视一切敌人,在战术上我们要重视一切敌人。
    • 적과 투쟁하기 위해,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에 한 가지 개념을 형성했다. 요컨대 전략 면에서 우리는 모든 적을 경시하고, 전술 면에서 우리는 모든 적을 중시해야 한다.
    • 〈각국 공산당과 노동당의 모스크바회의에서의 연설〉(1957년 11월 18일)
  • 美帝国主义九年来侵占了我国领土台湾,不久以前又派遣它的武装部队侵占了黎巴嫩。美国在全世界许 多国家建立了几百个军事基地。中国领土台湾、黎巴嫩以及所有美国在外国的军事基地,都是套在美帝国 主义脖子上的绞索。
    • 미국제국주의가 지난 9년 동안 중국의 영토 타이완을 점거했다. 얼마 전에 또 그것의 무장부대를 파 견해 레바논을 점거했다. 미국은 전 세계의 많은 나라에 군사기지 몇 백 군데를 건설했다. 중국 영토 타이완, 레바논과 외국에 있는 모든 미국의 군사기지는 다 미국제국주의의 목에 걸린 올가미이다.
    • 〈최고 국무회의에서의 연설〉(1958년 9월 8일)

마오쩌둥에 대한 어록[편집]

  • 오늘날 중국 국가는 헌법에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의 사상을 계승한다고 하며 중국 사회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회’라고 선전한다. 그러나 소련의 스탈린주의든, 그 변형된 버전인 마오쩌둥주의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이자 이론이다. 그러나 앞의 두 경향은 계급 기반에서부터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다르다.
    마오쩌둥주의는 1925~1927년 중국 노동자 혁명이 패배한 것의 산물이었다. 1930~1940년대 중국에서 이 운동은 제3세계에서 벌어진 민족해방 운동의 일부였다. 그러나 일단 민족해방 혁명이 승리하고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국가 권력을 쥐게 되면서, 마오쩌둥주의는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발전을 정당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됐다. 그리고 오늘날의 중국이 시장 스탈린주의 체제가 되면서, ‘사회주의’ 중국이 주는 이데올로기적 호소력은 냉전 때보다는 훨씬 약화했다. 중국 안팎 마오쩌둥주의의 역사적 궤적은 오늘날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이런 정치가 근본적 대안을 제시해 주지 못함을 보여 준다.
    • 김영익, 〈마오쩌둥주의 제대로 보기〉, 《마르크스21》 (2021년 7~8월)
  • 전적으로 문화 혁명의 기초가 되었던 마오쩌둥의 사고는 말 그대로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이 혁명 경험을 가져야 한다고 확신한 마오쩌둥은 젊은이들의 "자본주의 복원에 참여한 간부들, 중국의 흐루쇼프, 그리고 그러한 음모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비판을 방관했다. 이것은 이미 타락한 공산당 관료들을 타파하기 위한 꽤 강력한 혁명 속의 혁명이 될 수 있었다.
    자신의 스무 살 시절의 꿈을 재발견한 마오쩌둥은 청년들이 오래된 것들을 파괴하고, 가족과 학교, 그리고 사회의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도록 했다. 당시 한때 유행한 구호는 "모든 반란은 정당하다"였다. 이러한 호소에 움직여 봉기한 젊은이들은 사실상 몇 달 동안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기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선언된 그러한 해방은 마오쩌둥에 대한 우상숭배라는 비인간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홍위병은 '마오의 광적인 신봉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오쩌둥 자신이 조성한 정치투쟁이라는 틀 속에서 마오쩌둥에 의해 조종되는 단순한 하수인들에 불과했다. 이 전투는 마오쩌둥 자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결코 잃은 적이 없었던 권력을 되찾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는 무엇일까? 1962년 9월 당시 마오쩌둥은 자신의 몇 마디 말을 통해, 1961년 1월 이후 등장한 모든 대안에 대해 충분히 다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절대적이기를 바랐던 자신의 권력 보따리를 남에게 양도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거리낌 없는 반란을 호소했지만, 그러한 반란은 마오쩌둥 자신이 여러 가지 방어 수단을 통해 저지해왔으며, 또한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를 통해 피해 가려 했던 것이기도 했다. 목적과 수단이 심연처럼 갈라져 있었다. 이제 중국은 그 심연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 알랭 루, 《20세기 중국사》, 8. 유토피아의 제국: 1958~1976 (정철웅 역)
  • 중국 공산주의 역사상 그 어떤 사건도 대장정과 대장정의 전설만큼, 굳은 의지가 있는 사람은 극한의 절망적 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준 것은 없었다. 누구보다 많이 이 신념을 불러일으키고 발산시킨 사람은 마오쩌둥이었다.
    끝없는 투쟁, 영웅적 희생, 자기 부정, 근검, 용기, 이기심의 배제같이 잘 알려진 마오주의의 덕목은 마오 혼자만이 지지해온 가치가 아니라 대장정의 노련한 전사들에 의해 실천되고 전수돼온 가치였다. 이런 금욕적 가치들은 훗날 크게 선전되는 '옌안 정신'의 핵심을 이룬다.
    대장정 기간에 생존자보다 사망자가 훨씬 많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옌안 정신에 독특한 공헌을 했다. 살아남았다는 의식은 생존자의 혁명적 사명감에 신성함을 부여했으며 거의 종교에 가까운 헌신을 낳았다. 죽음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사명의 정당성뿐 아니라 지도자의 정책과 지혜를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김수영 역)
  • 마오는 사회주의의 건설자로서보다는 경제적 근대화를 이룩한 사람으로서 더 성공적이었다.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김수영 역)
  • 유령은 그 유령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유가 사라지지 않고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흔히 말하듯 '한풀이'도 하지 않았는데, 유령이 사라지겠는가? 마오의 유령이 나타나는데는 마오가 던진 어떤 문제들의 동시대적 중요성이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은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성격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이런 질문들은 주로 문화혁명기에 제기된 것들인데 크게 세가지이다.
    첫째, 사회주의의 가역성 문제이다. 이는 마오의 이른바 '대과도기론'과 스탈린의 '소과도기론'의 대립으로 나타난바 있는데, 사회주의가 다시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스탈린을 중심으로 소련에서 제기한 소과도기론에 따르면 사회주의에서 가역성의 가능성은 없다. 스탈린은 이를 '사회주의적 생산양식론'으로 정식화한 바 있는데, 하나의 독자적 생산양식으로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선진적 생산양식이므로, 자본주의가 봉건제로 복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의 기초는 생산관계 측면에서 국가소유와 생산력 측면에서 과학기술 혁명이 될 것이다. 다만 이런 사회주의적 생산양식론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위협 요소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주로 '외부의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반해 마오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장기간의 과도적 시기로 간주하였고, 이런 이행기의 특성상 사회주의는 늘 자본주의로 복귀할 위험성을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과 곧바로 연관되는데, 이런 가역성이 존재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마오는 복귀의 가능성의 근거를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적인 본질에서 찾았는데, 여기서 문제의 관건은 '소유제'가 아니다. 소유제는 단지 법적인 근거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국가부르주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走資派)이 국가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인가,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전화의 실패인가, 생산력인가 등등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마오는 분명한 대답을 내리지 않았고, 문화대혁명기의 논쟁도 여기에 다중적 답변을 주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일정한 정치적 분파의 문제인 것처럼, 때로는 '사상'(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구습에 가까운 것)의 문제로, 때로는 조직의 문제로 제기하기도 했지만, 다만 문제로 던져졌을 뿐 합의된 결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마오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생산력의 낙후를 근거로 삼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사실상 문제를 영원히 이월하는 것일 뿐, 문제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고 본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두 번째 질문에 이어지는 것으로, 그렇다면 이런 이행기의 가역성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여기서 사회주의 하의 정치의 새로운 형태라는 질문이 제기되는데, 사회주의를 일련의 프로그램에 따라 선진적 엘리트들의 주도로 계획된 플랜을 실현해가는 과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대중정치와 대중참여, 그리고 대중의 자기전화에 초점을 둘 것인가라는 대립이 나타나게 된다.
    마오, 그리고 마오가 중심적으로 얽혀있던 문화대혁명은 이 문제들을 다만 문제제기로서 던졌을 뿐 그 이상의 구체적 해답의 모색에서는 복잡하게 착종된 역사적 과정으로서만 남아있을 뿐이었고, 이는 때로는 마오의 모호한 정치적 결정을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어쨌건 이처럼 미해결의 형태로 제기된 마오의 질문들은 마오 사후에 개혁개방의 과정을 거치며 다시 마오의 유령과 더불어 되살아나지 않을 수 없고, 마오의 즉자적 안티테제로서 개혁개방의 이데올로기는 이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여 마오의 유령을 다시 무덤으로 되돌려 보낼 수 없는 취약함을 지니고 있다.
  • 마오의 가장 큰 이율배반을 보여준 사례는 마오가 문화혁명의 마오주의적 좌파들을 제거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을 종결시켰다는 점이었다. 그 좌파들은 처음에는 ‘극좌'에서 다시 '극우'로, '트로츠키주의자'로, 제국주의의 '첩자'로 다양한 죄명을 받고 사라져갔다. 1950년대 후반 반우파투쟁시기에 이미 등장한 이런 이율배반은 문화혁명기에 극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억제를 벗어나 폭발한 대중운동은 사회주의 하에서의 억압의 핵심적 적대세력으로 당관료를 지목하였고, 올바른 당과 잘못된 당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화한 당기구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갔다.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당이 아니라 당을 전복하는 대중운동이라는 역설에 직면한 마오는 결국 당의 편에 섰고, 인민해방군이라는 억압장치가 대중운동을 억누르게 되었으며, 당이 두 가지 노선에 의해 균열되어 있다는 입장을 버리고 당을 숙정함으로써 당의 무오류성을 회복하는 입장으로 전환하게 된다.
  • 지금은 인민공사도 평균주의도 실패로 돌아갔다. 인간의 주체적 의지를 담금질했던 그의 문화혁명의 기획은 십년동란으로, 중국현대사의 블랙홀로 먹칠되었다. 돌이켜보면 근 30년 동안 치룬 혁명전쟁, 1945년까지 항일민족전쟁, 45년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내전. 그러나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 종군해야 했던 항미원조투쟁(抗美援助鬪爭, 6․25 한국동란을 중국에서는 그렇게 명명한다)까지. 종국을 모르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전쟁의 연속으로 드넓은 대륙이 말 그대로 폐허에 다름 아니었을 터, 사회주의중국의 성립으로 세계냉전체제는 강고하게 구축되고, 중국은 오직 자력갱생으로 사회주의건설을 이루어야 했다. 농민혁명인 탓에 대다수 농민이 혁명의 주력을 이루었지만, 농촌에서는 땅에 대한 농민의 집착과 지주들의 횡포가 여전했고, 무엇보다 혁명 이후의 건설과정에서 펑더화이(彭德懷)의 눈물이 입증하듯이 농민주체와 지식인중심의 선진세력과의 간극을 해결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거듭되는 대약진과 인민공사의 실패, 있는 것, 믿을 구석이라고는 노동력뿐인데, 그러나 인간의 주체적 의지만 발동한다고 해서 연철이 강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데 마오의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낮은 수준의 평등과 언어의 통일,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법률적․제도적 보장 등 봉건적․종적 질서의 혁명적 해결, 소수민족의 규합, 대중노선을 통한 문화와 정치, 문화와 혁명의 결합, 그것들일까? 마오의 사회주의가 이루어낸 것들.
    지난여름 자금성 뒤 인공호수 호우하이(後海), 토요일 밤의 그곳은 여름밤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호수변을 따라 즐비한 카페들, 피서여행을 꿈꿀 수 없는 이들에게는 그 휘황한 서구식 카페들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밤하늘조차 나누지 않으면 한 발자욱도 나아갈 수 없는 혹서의 밤. 그러나 그 밤을 가르는 것이 있었다. 당시의 기록을 뒤적여본다.
  • 마오는 미국의 위협에 직면하여 공적으로는 당당한 태도를 취했으며, 사실상 스탈린의 경고들도 무시해 버렸다. 장제스가 모든 힘을 동원하여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전면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한 1946년 스탈린은 마오에게 장과 제휴하고 제2인자 역할을 맡으라고 권유했었다. 스탈린은, 저항하게 되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오랫동안 장에게 호감을 보여 왔었다. 씁쓸하긴 했지만 마오도 이 사실을 알았다. 스탈린은 심지어 장이 1927년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대량 학살을 할 때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적대시한 일이 있은 후에도 장을 지원했었다.
    스탈린이 상하이의 장제스를 지원하다 결국은 우한(武漢)의 공산주의자들과 좌파들을 지원하게 된 것은 정말 싫으면서도 마지못해 취한 조치였다. 1930년대의 통일전선 동안 스탈린은 장에게 비행기와 무기 그리고 군사 고문단―그들 중에는 1927년의 대량 학살 사태를 간발의 차이로 피한 사람도 일부 있었다―을 보내 주었다. 마오에게 그가 보낸 것은 오로지 비행기에 가득 실은 선전 삐라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하자 스탈린은 마오에게 장과의 전쟁을 중단하고 동북구(東北區)의 일본군에 대해 자살적인 공격을 감행하라고 요청했다. 마오는 거절했다.
    마오는 스탈린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착각하지 않았다. 동시대의 한 소련 역사학자는 "스탈린은 두 중국 정책에 찬성했다"고 말한 바 있다. 스탈린은, 장은 약해서 모스크바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고 느꼈다.
    • 해리슨 E. 솔즈베리, 《새로운 황제들》(박월라, 박병덕 역), 2. 향산의 시인
  • 마오의 마음은 철학적이고 시적이다. 그는 중국의 고전들을 보면 편안한 마음을 느꼈다. 그는 공자와 그의 제자 맹자를 알았으며, 명나라와 당나라,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왕조들이 경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통계를 지겨워했으며, 이러한 세부 사항들을 부하들에게 맡기고 싶어했다.
    대장정과 혁명 시기에 마오의 큰 힘은 대중운동의 효력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는 자기가 대중의 힘을 동원한다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하나도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산을 옮긴 한 늙은이에 관한 그의 유명한 우화를 문자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어마어마한 인구의 힘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었다.
    • 해리슨 E. 솔즈베리, 《새로운 황제들》(박월라, 박병덕 역), 14. 덩이 그의 최대사업을 붙들고 늘어지다
  • 마오는 '총체적인 해결'을 매우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변화의 수단으로서 철학을 신봉했고, 사회는 항상 안정기와 혼란기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믿었다. 변화는 난(亂)의 상태에서 생기는 것이었다. 안정이란 정체(停滯)를 의미했다. 격동 속에서 진보는 이루어지고, 새롭고 유능한 인재와 사상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마오 연구가인 리쩌허우에 의하면, 마오는 전국시대의 역사를 읽은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책이다. 그러나 나는 평화로운 시절을 다룬 대목은 싫다. 혼란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평화의 시기는 사람들의 발전에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점을 참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마오가 내린 숙명적인 결정에 배경으로 작용했는지 여부는 결코 알 수 없다. 마오는 일기를 쓰지도 않았고 비서들이 그의 모든 생각을 다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마오가 장제스를 패배시키고 공산주의 기치 아래 중국을 통일시킨 자신의 역사적 공적을 자부하고 있었고, 문화혁명이라는 십자군은 그보다 더 위대한 사업이라고 믿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생각하기에 문화혁명은 자신이 성취한 혁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완성하기 위한 혁명이었다. 그는 오염과 불순함, 그리고 당 내부로부터의 배반에 의해 혁명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혁명을 창조한 사람들이 그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캉성의 독소를 지닌 말이 효력을 발휘했다. 마오가 생각하기에 이 새로운 캠페인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1949년의 인민공화국 건국보다도 위대한, 그의 마지막 업적이 될 것이었다. 이는 자신의 이름을 위대한 중국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황제 중의 황제로서 맨 첫머리에 올려놓게 만들 것이라고 마오는 확신했던 것이다.
    • 해리슨 E. 솔즈베리, 《새로운 황제들》(박월라, 박병덕 역), 25. 독이 묻은 종이
  • 마오는 중난하이에 돌아온 이후로 갈수록 바깥세상과 동떨어져서 여러날 혹은 수주일에서 수개월씩 침대에 축 늘어져 있는 생활 속에 빠져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회의에 참석하고, 새로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지방 시찰을 하는 등 거의 광적으로 일에 매달렸다.
    마오의 비현실적이고 꿈 같은 사고방식이나 끝없이 날아가는 환상의 세계에서 확실히 아편 냄새가 났다. 문제는 마오의 이런 추상적 사변이나 환상이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중국의 국내외 정책에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 해리슨 E. 솔즈베리, 《새로운 황제들》(박월라, 박병덕 역), 32. 린뱌오의 그림자
  • 마오의 인품은 충성심을 끌어냈지만 애정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는 성미가 불같았지만 동시에 무한한 인내심도 있었다. 미래를 내다보는 넓은 시야를 지녔으면서 세부 사항을 살필 때에는 지나치게 규칙에 얽매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번 뜻을 세우면 굽힐 줄 몰랐지만 극도의 섬세함도 지니고 있었다. 공적으로 카리스마의 화신어었지만 사적으로는 음모가였다.
    • 필립 쇼트, 《마오쩌둥》 (양현수 역)
  •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그를 빼놓고는 중국의 현대사를 말할 수 없다. 마오쩌둥(이하 마오)은 ‘혁명으로서의 사회주의’와 ‘제도로서의 사회주의’ 모두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마오는 자기 자신이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에 대해 공(功)이 70%, 과(過)가 30%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마오에 대한 인민의 평가도 여기서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마오에 대한 평가가 쉽지 않은 것은 이처럼 공과 과가 한 몸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레닌의 공과 스탈린의 과’로 비교적 딱 떨어지게 평가하는 소련 공산당과 비교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오는 죽은 지 40년이 가까워 오지만 그의 유령은 아직도 중국대륙을 배회하고 있다. 그 이유는 중국 인민들의 고단한 현실이 마오를 부단히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주민 종교 신앙 조사에 따르면 중국인 가정 중에 마오상(像)을 모시는 경우가 11.5%에 달했는데, 이는 조상신을 모시는 가정(12.1%) 다음 순위였다. 그 다음 불상이 9.9%, 재물신이 9.3%였다. 그만큼 마오는 아직도 중국 인민들에게 밀착되어 그들의 사고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런 현상은 중국 사회 내부의 극단적 ‘단절’이 심화되고 민생이 도탄에 빠질수록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G2를 넘어 G1이 멀지 않아 보이는 중국의 또 다른 모습이다. 문제는 그럴수록 마오의 행동과 사상이 중국 인민들에게 객관적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데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지식인 사회에도 나타나고 있다. 인민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인민들에게 마오가 살아 있는 것처럼 지식인도 마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최근 담론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 근원에는 문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메타포(metaphor)의 대립’이 존재한다. 1990년대에 있었던 신좌파-자유주의 논쟁으로부터 대립은 시작되었다. 신좌파는 1990년대 나타난 중국 사회의 문제가 중국이 전 지구화(globalization)의 구성 부분이 되면서 나타난 시장 패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시장에 권력이 과도하게 간섭한 것이 문제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들은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에도 전제주의의 잔재가 강력하게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 조경란, "중국인의 자기성찰 가로막는 거대한 그림자...마오쩌둥은 여전히 살아있다", 주간조선 (2014.06.01)
  •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마오를 서술할 때 주목해봐야 할 것은 바로 마오가 혁명가이면서 정치가이지만, 동시에 이상주의적 사상가이면서 시인이라는 사실이다. 마오 연구가인 리저허우(李澤厚)도, 벤저민 슈워츠(Benjamin Schuwartz)도 이 점에 주목하는데, 마오는 학창 시절 다른 것은 몰라도 작문 시험에서는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리저허우는 마오의 사상적 특색이 그의 시사(詩詞) 창작 속에서 부단히 표현되었으며 마오의 사상과 개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청년 시절 마오는 “애석하게도 저는 지나치게 감정이 풍부하여 너무 의분에 빠져 슬퍼하고 분개하는 병폐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다. 벤저민 슈워츠는 심지어 마오에게서 시가 변증법, 인식론보다 더 중요한 철학의 핵심을 이룬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로 보면 마오의 주의주의와 주관주의는 그의 시적 감수성에 의해 강화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제 이런 면들을 배면에 깔고 마오의 극적인 인생과 사상을 살핀다면 그를 이해하는 데 좀 더 도움이 될 것이다.
    • 조경란, "중국 지식인의 초상 마오쩌둥, 유토피아를 꿈꾼 시인이자 독재자", 주간조선 (2014.06.15)
  • 마오쩌둥은 워낙 모순이 가득한 복잡한 인물이다. 연구자들마다 그의 지성과 광기 사이에서 접점을 찾느라 고심이다. 그의 뚝심과 지혜에 감탄 하는가 하면 그의 변덕과 잔인함에 놀란다. 혁명가로서의 집념과 집중력에 경탄하다가도 ‘조반유리造反有理’ 즉 ‘뒤집어엎는 것도 이유가 있다’라고 하며 스스로 창업한 것을 파괴해 버리는 그 반동성에 기겁을 한다. 하지만 마오쩌둥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가 하나 있다. 그는 인간 다이너마이트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정말 기운이 강한 사람이었다. 창조하는 열정이든 파괴하는 정열이든 문자 그대로 에너지의 결정체였다. 그는 일찍이 자신이 호랑이의 기운과 원숭이의 기운을 갖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냉혹하고 무정한 일면과 낭만적이고 열광적인 일면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한 이유가 바로 그런 성격 탓이 아닐까 싶다. 이른바 호랑이 기운이란 직선적이고 망설이지 않는 결단력이다. 원숭이 기운이란 끊임없이 고민하고 구상하는 상상력이다. 그의 극단적이고 끝을 보는 성미와 허황되다 싶을 만큼 순진한 공상이 바로 그 호기와 원기의 겸비에서 나온 것이다.
    • 조광수,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현대 중국 정치와 리더십〉, 《오늘의 동양사상》(2007.10)
  • 마오가 후대에 물려준 것은 복잡하고 풍부한 유산이며, 먹을 수도 없지만 버릴 수도 없는 과실이다. 중국 역사에서 보기 드문 유토피아 사상가이자 독재자로서 그의 사상과 실천 속에서 천재적인 상상과 심각한 후과가 하나로 교직되어 있다. 서방 공업 문명의 폐단을 피하고 비(非)서구의 현대화 노선을 탐색했던 천재적인 마오의 상상과 실험은 그가 새롭게 세워낸 전제체제와 이로부터 발생한 엄중한 후과가 하나로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 첸리췬(錢理群),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
  • 질문하셨듯이, 중국의 민간사상가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바로 마오저둥과의 관계이지요. 중국은 사상 통제가 세계에서 가장 심한 국가입니다. 따라서 이런 민간사상가들이 자신의 사상적 자원을 찾거나 많은 자원을 접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오저둥은 그들의 사상을 일깨웠습니다. 마오저둥의 사상은 중국에서 이중 역할을 합니다. 그의 사상은 체제의 대표이자 건설자입니다. 또한 반체제적이고 이단적인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이단적인 면이 자주 영향을 미치지요. 방금 분석한 부 시기에서 마오는 어느 정도 이런 환경을 조성하였습니다. 1957년 마오는 ‘鳴放’을 제시해 모두가 의견을 밝히도록 권장했고, 문혁은 마오가 주동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마오의 반항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이런 것이 공교롭게도 환경을 조성한 데다 그의 글이 이런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독립적 사고를 주장했던 것이지요. 특히 마오저둥 시대의 민간사상가는 모두 처음에는 그의 ‘신도’였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부응해 반항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마오는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반항할 수는 있지만 나에게 반항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마오의 사상 범위 안에서 생각해야 하고 그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반항해야 합니다. 만약 이 울타리를 벗어나면 탄압을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는 사상의 계몽가인 동시에 민간사상가에 대한 탄압의 주체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민간사상가들은 그의 영향으로 독립적인 사고를 견지했지만 결국은 필연적으로 그에게 반항했습니다. 거의 모든 민간사상가가 마오저둥의 ‘신도’에서 ‘반항자’로 변모하는 이런 과정을 겪었습니다. 문혁 때는 저 역시도 ‘마오저둥주의자’였습니다.
    • 첸리췬(錢理群), 조경란과의 대담 〈‘중국’을 회의하며 계몽하다 -중국문학사 연구자 첸리췬(錢理群)-〉, 東方學志 제163집(2013년 9월), 289~324쪽에서 인용.
  • 마오의 목표가 마르크스주의의 사회 개조 격납고에서 나왔다는 것은 과거보다 훨씬 더 명쾌하다. 이것은 중국인의 정신을 균형에서 벗어나 양극화로, 조화에서 벗어나 투쟁으로, 개인적 가치에서 벗어나 동양의 스파르타 같은 집단적인 가치로 개혁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 목표와 방법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쩌둥 시대에 많은 비극이 야기됐다.
    • 로스 테릴, 《마오쩌둥》
  • 이 책은 20세기 위대한 혁명가이자 막강한 폭군이었던 인물에 관한 책이다. 그는 다음 두 가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나는 외세의 침략에서 나라를 해방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독재 수단을 통해 모든 이가 평등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첫 번째 임무를 성공했으나 두 번째 임무는 실패했다. 중국은 마침내 마오쩌둥이 통치하던 시절에 지정학적으로 세계의 중심이 되고 정치적으로 양대 초강대국과 등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만과 폭력을 바탕으로 참을성 있는 중국 인민들에게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를 강요하고, 그들을 피비린내 나는 사회 실험의 나락으로 몰고 간 것 역시 마오쩌둥과 그가 이끈 공산당이었다. 그 결과 기아와 억압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죽음에 이르렀다. 마오쩌둥은 국가를 통치하면서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라는 공자의 현명하고 인간적인 교훈을 따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마오주의자들의 실험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 평전》 (심규호 역)
  • 공산당 내에서 거의 매일 벌어지던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 속에서 한때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후난 성 출신의 열정적이고 젊은 지식인이었던 마오쩌둥은 점차 그 자신이 지닌 격정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계급 투쟁과 청산을 포함한 사회주의의 가설은 서로 부딪치도록 설정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공포와 테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당내 반대파와 계급의 적, ‘착각에 빠진’ 동지에 대한 마오쩌둥의 투쟁은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감정의 잔재마저 모두 없애 버리고 말았다. 그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동지애가 아니라 증오와 보편적인 의혹이었다. 사랑, 선함, 충성, 신뢰는 그의 메마른 감정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그의 삶은 키메라처럼 망상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결국 냉혈한 공산주의 독재자가 되었고, 권력의 정점에서 고독한 노인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 몇 년 동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접촉으로부터 점차 격리되면서 외롭고 병든 황제는 자신이 저지른 폭정의 결과를 맛보아야 했다.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 평전》 (심규호 역)
  • 그는 사회 관계를 변혁시킨 혁명가일 뿐만 아니라 쑨중산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중국인을 존중하게 만든 위대한 반제국주의 혁명을 실현시킨 민족 영웅이기도 하다. 그는 오랜 기간 분열되어 권력 투쟁을 일삼고 내전으로 신음하던 중국 대륙을 통일시켰다. 중국이 마침내 세계의 지정학적 중심지 가운데 한 곳으로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초강대국과 정치적으로 등거리에 위치하여 세계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그가 통치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마오쩌둥의 통치 시기에 중국인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중국 경제는 낙후된 상태였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고대 왕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국가에 대해 자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중국인들이 결코 '위대한 조타수'를 잊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민족 해방을 가져왔지만 사회적 노예 상태를 조성하기도 했다. 기만과 폭력을 통해 중국 인민들에게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의 고통을 강요하고, 그들을 피로 물든 사회적 실험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것은 바로 그와 그가 이끈 공산당이었다. 수억 명의 삶이 이로 인해 고통을 받고 수천만 명이 기아와 억압 속에서 비명횡사했다. 모든 세대가 세계 문화와 고립된 채로 살아야만 했다. 마오쩌둥의 반인륜적 범죄 행위는 스탈린을 비롯한 21세기 다른 독재자들의 사악한 행위 못지않게 끔찍했으며, 그 규모 면에서 훨씬 컸다.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 평전》 (심규호 역)
  • 중국의 유능한 정치가, 역사가, 시인, 철학자,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재자, 활기 넘치는 조직가, 숙련된 외교가,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의 국가 원수 등 이미 성취한 것에 안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수백만 인민의 삶과 사고방식을 개조하고자 했던 지칠 줄 모르는 혁명가이자 민족 혁명과 피비린내 나는 사회 개혁의 영웅이기도 했다. 이것이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마오쩌둥의 모습이다. 그가 보여준 삶은 규모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그 의의를 한 가지로 말할 수 없다.
    •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마오쩌둥 평전》 (심규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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