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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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방정환(方定煥, 1899년 11월 9일 ~ 1931년 7월 23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아동문화운동가, 어린이 교육인, 사회운동가이다. 본관은 온양(溫陽)이며 호는 소파(小波)로 일본 유학 시절에 그에게 영향을 끼친 일본의 아동 문학가인 이와야 사자나미(岩谷小波)의 이름과 같다. 이외에도 잔물, 잔물결, 물망초, 몽견초, 몽견인, 삼산인, 북극성, 쌍S, 서삼득,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 김파영, 파영, ㅈㅎ생이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언론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1931년 7월 23일, 오랜 지병과 과로로 인한 고혈압의 합병증으로 인하여 향년 33세로 타계했다.

어록[편집]

  • 어린이는 복되다. 어린이는 복되다. 한이 없는 복을 가진 어린이를 찬미하는 동시에, 나는 어린이 나라에 가깝게 있을 수 있는 것을 얼마든지 감사한다.
    • 〈어린이 예찬(禮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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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최근 수정 시각: 2019-11-25 08:44:25


분류 종로구 출신 인물온양 방씨사회운동가한국의 독립운동가일제강점기의 천도교 신자1899년 출생1931년 사망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 수훈자 파일:건국훈장애국장약장.jpg 파일:건국훈장애국장.jpg 파일:external/dimg.donga.com/6865970.1.jpg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중절모를 쓴 방정환 선생. 파일:attachment/room.jpg 일본풍 옷을 입은 방정환 선생.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싹을 위하는 나무는 잘 커가고 싹을 짓밟는 나무는 죽어 버립니다." 1923년 5월 1일 "위대한 예술을 품고 있는 어린이여! 어떻게도 이렇게 자유로운 행복만을 갖추어 가졌느냐! 어린이는 복되다. 어린이는 복되다. 한이 없는 복을 가진 어린이를 찬미하는 동시에, 나는 어린이 나라에 가깝게 있을 수 있는 것을 얼마든지 감사한다." 〈어린이찬미〉, 1924년 5월 15일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방정환(方定煥, 1899년 11월 9일 ~ 1931년 7월 23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어린이 교육인, 사회운동가, 아동문학가이다. 본관은 온양 방씨 판서공파, 호는 소파(小波)이다. 공식 홈페이지로는 한국방정환재단이 있다.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이며 《개벽》지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여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는 생전에 유일하게 출판한 번안동화 단행본인 《사랑의 선물》과 탐정소설 〈칠칠단의 비밀〉 등이 있다. 2. 생애[편집] 1899년 11월 9일 한성부 서부 적선방(積善坊) 야주현계(夜珠峴契)[1]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경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마음씨 좋은 고모에게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가난했다. 게다가 어려서 어머니와 누나를 잃었고 새어머니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여, 그림 그리기와 글짓기에만 몰두했다.

7살 때인 1905년 삼촌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김중환 교장의 설득으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했다. 보성소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했는데, 이를 본 할아버지 방한용은 매우 화를 냈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손주의 뜻을 존중하여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묵인했다. 어려서부터 천성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1908년 불과 열 살 나이의 소학생으로서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 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했다.

1913년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다. 1913년 이광수가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게재되기도 했다. 그 후 새어머니의 병환으로 2년 만에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했다.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은 아들이 공부를 계속하기 바랐으나,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1916년에는 생활비 조달을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취직해 서류 필사 업무를 했지만 곧 사직했다. 조선인의 토지를 수탈하는 토지 조사 사업을 담당하여 지탄을 받는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사직 후 천도교 청년회, 개벽사, 천도교 소년회 등의 천도교 기관에서 열심히 일했다. 부친이 성실한 천도교 신자였고, 자신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8년에는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 손용화와 중매 결혼했다. 결혼하던 해에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5년간 활동하면서 어린이 운동에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 장인 손병희의 권유로 1918년 보성전문학교[2] 법과에 입학했다.

1919년에는 장인을 도와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독립선언문을 인쇄하다가 일본 경찰이 들이닥치자 등사기를 우물 속에 던져넣어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있다. 한 때 고문을 받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적도 있는데, 당시 동료들 몇 명은 감옥에서 옥사까지 했으니 상당히 고초가 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든 이때부터 위험인물로 분류되어 고등계 형사들에게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다.

1919년 말에는 일본 도쿄에 유학가서 도요대학 철학과에 입학했고 거기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도요대학 철학과에 다닐 때 마해송, 윤극영 등과 함께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3] 김기전과 함께 어린이날을 만드는 등 활발한 어린이 교육 사업을 전개했다.

1920년~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계급 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을 연재했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으며, 사회주의자가 쓴 글을 소개했다. 1921년에는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외국 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했다. '사랑의 선물'은 방정환이 살아있을 때 만든 유일한 단행본이며, 난파선, 산드룡의 유리구두, 왕좌와 제비, 잠자는 왕녀 등 번안 동화 10편이 실렸다. 이렇듯 외국 작품을 많이 번역했으며 본인이 써낸 소설은 더 많다. 여러가지 가명[4][5]을 사용해서 수많은 작품을 써냈다. 신문과 잡지에 수필도 많이 기고했다.[6]

1921년에는 김기전과 함께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상하관념과 나이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 아래에서 사회적 약자들인 어린이들이 천시와 억압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또한 일제강점 치하에서 조선 사람의 미래는 어린이들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실제로 어린이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자!는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다. "아동인권 존중의 역사, 한국서 먼저 태동"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7]를 창간했다. 그가 창간한 '어린이'는 매년 10만 부씩 판매되는 등 사상 유례없는 인기를 누렸고,[8] 이원수, 마해송 등 아동문학가들이 이름을 알리는 장이 되어 한국 아동문학계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1927년에는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 후로도 '아기별 삼형제'[9] 등의 동요를 짓고, 추리소설인 '칠칠단의 비밀'[10] 등을 집필했다. 물론 외국 동화도 계속 번역했고, 세계 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그가 기획한 전시회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이야기 하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서 동화구연을 하러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매년 70회, 통산 1,000회 이상의 동화구연을 했으며, 당시로서는 시골인 경상남도 양산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다.[11] 고등경찰의 의심을 받아 감옥에 갔을 당시에도 죄수들에게 얘기를 너무 재밌게 해 줘서(슬픈 이야기를 하면, 몰래 이야기를 듣던 간수들도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나중에 석방될 때 다른 죄수들(+간수들)이 그를 못 가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방정환 스스로도 '신데렐라' 동화구연을 하고나서 이렇게 회고했다. “남녀 선생이 가끔 얼굴을 돌이키고 눈물을 씻으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때 학생들은 벌써 눈물이 줄줄 흘러 비단저고리에 비 오듯 하는 것을 그냥 씻지도 않고 듣고 있었다. 그러다 이야기가 산드룡(신데렐라의 프랑스 발음)이가 의붓어머니에게 두들겨 맞는 구절에 이르자 그 많은 여학생이 그만 두 손으로 수그러지는 얼굴을 받들고 마치 상갓집 곡성같이 큰소리로 응- 응- 소리치면서 일시에 울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선생들도 일어나 호령을 할 수 없고, 나인들 울려는 놓았지만 울지 말라고 할 재주는 없고 한동안 단상에 먹먹히 서 있기가 거북한 것은 고사하고 교원들 뵙기에 민망해서 곤란했다.”

그를 감시하기 위해 그의 강연에 항상 참석했던 고등계 형사도 그의 최루성 동화구연에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강연을 듣다 보면 자기도 자지러지게 울어야 했기 때문이다.[12] 이런저런 이유로 당시 고등계 형사였던 미와 와사부로는 방정환을 이렇게 평가했다. “방정환이라는 놈, 흉측한 놈이지만 밉지 않은 데가 있어… 그놈이 일본 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경부 나부랭이한테 불려다닐 위인은 아냐… 일본 사회라면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

1930년대에는 중앙유치원 사범과에서 아동문학을 가르친 기록이 있다.

하지만 너무 열성적으로 활동한 나머지 건강이 나빠졌다. 특히 1931년부터 과로와 비만에 엄청난 골초였던 탓에 지병인 고혈압이 악화되었고 결정적으로 동아일보의 신동아 창간으로 인해 "개벽"의 판매 조직이 와해되면서 스트레스가 겹쳐 자리에 눕게 되었다.

결국 1931년 7월 23일 향년 31세에 고혈압으로 별세했다. "문간에 검정 말이 모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으니 가야겠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돌아가실 때까지 어린이를 걱정한, 영원한 어린이의 동무.

1980년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0년 후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슬하에 방운용(1918~2002) 전 색동회 부회장 등 2남을 두었다. 3. 기타[편집] 사진만 봐도 상당히 살이 찐 것을 알 수 있는데, 본래 몸이 상당히 허약하였기에 장인인 손병희가 보약을 많이 먹였고 그로 인해 살이 쪄버렸다고 한다.[13][14] 너무나도 뚱뚱해서 맞는 허리띠가 없었고 땀을 자주 흘려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수시로 닦았다고 한다. 택시를 탔는데 너무 무거워서 택시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15] 아동문학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의 출판사업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잡지 '녹성'을 창간했고, 이화학교 출신들과 더불어 '신여자' 편집에도 개입했다. 이때 이화학당 출신의 신준려라는 여성을 만났는데, 유부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준려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한다. 친일파라는 소문이 있지만 실은 그냥 일본의 문학가 이와야 사자나미(巖谷小波)를 존경해서 그의 이름을 호로 썼다는 소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소파(小波)란 호는 잔잔한 물결처럼 천천히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바꾸겠다는데에서 유래했다고 방정환이 밝힌 바 있다. 설령 진짜 존경해서 그랬어도 개인으로서 어떤 인물을 존경한 것이 친일과 바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오히려 결론적으로 소파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시고, 개인적으로도 정성껏 쓴 많은 글들이 일제의 검열 때문에 뭉텅뭉텅 잘려나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었다. 실제로 3.1 운동 당시 장인어른인 손병희를 따라 만세운동 격문을 찍고 배포하던 도중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면 방정환 선생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었다는 것. 한번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강연회에서 '난파선'이라는 이탈리아 동화를 번안해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모든 어른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든 관객도, 심지어는 감시차 방문했던 일본경찰도 눈시울을 적셨다.[16] 문제는 그날따라 물을 많이 마셔서 오줌이 많이 급했는데, 이야기를 끝내고 황급히 화장실을 가던 차에 어떤 아이의 어머니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에 답례하느라 바지에 실례를 조금 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묘는 중랑구 망우동의 망우리공원[17]에 있는데, 특이하게도 돌무덤이다. 봉분 대신에 자연석들을 두르고 그 위에 묘지석을 얹어 놓은 형태. 그의 묘비에는 '동심여선(童心如仙)'[18]이라는 글씨가 크게 써 있고, 밑에 '어린이의 동무 소파 방정환의 묘'라고 쓰여 있다. 방정환의 묘비명인 '동심여선'은 맹꽁이 서당의 작가인 윤승운 화백이 사인을 할 때마다 반드시 사용하는 글귀이다. 방정환을 평생의 스승으로 생각한 아동문학가 최신복은 역시 방정환의 숭배자였던 부친의 묘를 선산에 쓰지 않고 소파의 묘 옆에 장만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죽어서 소파 옆에 묻혔고 최신복의 부인도 그 곁에 합장되었다. 참고로 최신복의 여동생 최순애는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아내였는데,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잘 알려진 '오빠 생각'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방정환 선생이 엄한 사람을 헛지목해 중상모략한 사건도 있었다. 바로 당대 최고 엘리트 여성이었던 김명순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트린것이다. 잡지 『별건곤』에 "김명순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고도 처녀 행세한다"는 전혀 근거없는 글이 실렸는데 이 글을 방정환이 썼다고 한다. 김명순은 이 기사를 쓴 방정환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연재는 중단되었다. [19] 방정환은 김명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친분이 있는 김기진이 평소 김명순을 악의적으로 비난하는것만 보고 멋대로 오해하고 저지른 일이었다. 방정환은 여성이 교육받을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해온 사람이었으나, 이처럼 동시대 문인이던 여성을 유언비어로 비난했으며 그것도 여성의 성윤리를 남성의 잣대로 판단하고 언어적 성폭력을 가하는 등 여성혐오와 시대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다. 아무튼 이 사건은 방정환의 크나큰 오점이며, 후에 김명순이 이와관련된 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것을 감안하면 정말 악질적인 범죄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도 나온다. [1]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당주동, 세종문화회관 서쪽 뒷길. [2] 당시 보성전문학교는 천도교 재단에 의해 인수되었다 [3] 색동회라는 이름은 후에 동요작가로 활약하게 되는 윤극영이 예쁜 색동저고리를 떠올리며 제안한 이름이다. [4] 소파, 잔물, 몽견초, 몽견인, 삼산인, 북극성, 쌍S, 서삼득,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 김파영, 파영, ㅈㅎ생 (오타나 초성체가 아니라 정말 방정환 선생이 썼던 필명이다)…많기도 하다. 이렇게 많은 가명을 쓴 건 잡지사에 사람이 없어서……. [5] 한국의 어떤 전설적인 게임음악 작곡가가 세기말에 이걸 재현한 바 있다. 이쪽도 역시 개발사에 사람이 없어서……. [6] 1920년대의 글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문체가 굉장히 현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7] 1923년에 창간되었으며,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에 따라 1934년 7월 발간 중지될 때까지 통권 122호를 찍었다. 처음에는 엽서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보내 주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 준다고 선전해도 불과 8명이 신청할 만큼 큰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방정환이 구연동화를 하며 열심히 선전하자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 [8] 당시 서울 인구가 30만 명이었으니, 매년 10만 부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 참고로 요즘 월간조선과 한겨레21의 발행부수가 매년 4만 부다. [9] 오늘날에는 '형제별'이라는 제목으로 더 알려져 있다. 동영상 참조 [10] 조선 아이들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팔아버리는 조직에게 잃어버린 누이동생을 찾아 나선 오빠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한반도와 중국을 오가며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담고 있다. 1970년대에 극장용 만화영화로 만들어졌고, 2008년에 MBC에서 TV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11] 이때 이원수가 양산까지 찾아와 구연을 하는 방정환의 모습에 감명을 받고 아동문학가가 되었다고 한다. [12] 한번은 고등계 형사가 참석했다가 구연을 중지시키라고 외쳤는데 이미 이야기에 푹 빠져있던 사람들은 듣지도 못했고 종국엔 형사 자신도 이야기에 빠져버려 구연을 마치자 울다가 자기 입장을 자각하고 허겁지겁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이미 청중들이 다 보고 만 터라 망신을 당했다. 이후 방정환은 '형사를 울린 남자'란 별명이 붙게 되었다. [13] 한약 복용의 부작용으로 살이 급격하게 찌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에 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 [14] 방정환 선생이 급격히 비만이 된데는 다른 이유도 있는데, 이 역시 손병희 선생때문이었다. 당시에 자신의 딸과 함께 문안인사를 드리는 사위가 갈비씨인걸 보고 안쓰러웠던 나머지, 그 뒤로 방정환 선생이 처갓집을 찾을 때마다 항상 고기반찬같은 기름진 음식을 자주 먹였다고 한다. 의도는 좋았다 그래도 보약을 먹인 건도 그렇고, 이런 일화가 있다는 점에서 보면 손병희 선생이 어지간히도 사위바보였던 듯하다. [15] 물론 상식적으로 뚱뚱한 사람이 탔다고 자동차가 안 움직일 일은 없다. 사람 여러명 태우고 짐까지 실어도 문제없는데... 그냥 워낙 뚱뚱하다 보니 당시에 농담으로 퍼진 소리일 것이다. 이런 말이 떠돌 정도로 매우 뚱뚱했다는 의미라 보면 된다. [16] 항목에 포함되어있으니 살펴 볼 수 있으나 결말이 감동적이면서 비극적으로 누구나 슬퍼할 만한 동화이다. [17] 한용운, 이중섭 등의 묘와 함께 있다. [18] 아이 마음은 신선처럼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다. [19] 그러나 1927년 김명순이 아이를 입양하자 잡지 『별건곤』은 '김명순이 혼외자로 낳은 아기의 성을 무엇이라 붙여야 할지 몰라 애쓴다'고 공개적으로 언어적 성폭력을 계속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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