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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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관이 책임질테니 저질러라’주문… 이제 조금씩 움직여”
[편집]〈“‘장관이 책임질테니 저질러라’주문… 이제 조금씩 움직여”〉, 문화일보, 2015년 07월 31일
- 칼 슈미트라는 독일의 헌법학자가 있는데, 우리나라 헌법학계에선 그의 이론(결단주의)을 극복하는 게 현실적 목표였습니다. 197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1980년대에도 칼 슈미트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거든요. 이론적으로 그에 대항하는 사람이 역시 독일의 루돌프 스멘트였는데 허영 교수님과 저는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보다 정교한 헌법학 체계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많았습니다. 퇴계와 율곡 이야기를 하지요.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퇴계 이황의 길을 갈 것인가, 율곡 이이의 길을 갈 것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세와 거리를 두고 고고하게 살면서 좋은 제자를 많이 길러 내 큰일을 하게끔 하는 게 퇴계의 길이라면, 율곡의 길은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해 칼을 빼 들고 개혁을 단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사회과학자로서 두 가지 마음을 모두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역대 정부에서 개혁 작업에 대부분 관여했는데 이를 보면 율곡의 길을 따랐던 것 같고, 반대로 이론 구축에 대한 열망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월호 사고가 터졌습니다. 단순 교통사고에 그치지 않고 국가가 위기를 맞는 사건으로 번졌습니다. 이 사고를 겪으면서 사회의 부정부패, 부조리의 구조적 문제, 관련 국가 시스템의 취약점 등 사회적 적폐가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게 국가 대개조 사업이었습니다. 전면적으로 국가를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때 입각 제의가 있었습니다. 국가위기 상황까지 갔는데 책을 읽고만 있을 것이냐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학자가 공직에 나선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학자의 명성도 현실정치에 관여하면 엉망진창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고심 끝에 행자부(당시 안전행정부) 장관을 맡기로 결심했습니다. 율곡은 일찍이 ‘선비가 책을 읽은 뒤 거기서 얻은 내용으로 만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면 선비라 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저 역시 이러한 생각으로 장관직을 맡게 됐습니다.
- 공직 사회에 들어와 보니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이 무엇인지를 피부로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 감수를 안 하려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잠재 역량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우선 보따리를 풀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장관이 책임을 질 테니 일을 저지르라고 지시했죠. 설거지하다가 접시를 깰 수도 있는 것이고, 특히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다가 새롭게 몸을 쓰다 보면 실패할 확률이 더 높지 않겠어요. 그래도 참아줬죠. 그러니까 조직이 조금씩 바뀌더라고요. 자발적으로 변한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현재는 소꿉장난 같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조그마한 사례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저는 안팎에 자주 이야기합니다. 행자부를 이끄는 게 아니라 국가혁신부(國家革新部)를 이끄는 각오로 일하고 있다고요. 행자부의 이러한 변화가 정부 전체에 확산됐으면 합니다.
- 현실적으로 보면 선출 권력 자체가 직업화되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한 번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재선, 3선 등 다선을 추구하는 행태로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나온 게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가미하는 것입니다. 직접 투표를 한다든지 아니면 국민 소환을 한다든지 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강자 독식의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공동선이라는 게 잘 안 만들어지는 거예요. 1980년대 나왔던 참여 민주주의도 똑같은 문제점을 노출시켰습니다. 적극 참여하는 사람이 이익을 독식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겁니다. 현재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선 전통적이고 큰 권력들이 작은 권력에 의해 약화되고 죽어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언론도 그렇지 않습니까.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사 결정과 실제 권력 집행까지는 간극이 있는데 부분이익들이 이에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공동선과 공통이익을 어떻게 도출해나가야 하는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닙니다. 종전 국가 틀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렇듯 구조적으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는 정부에 대해 신뢰를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사법부 역시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통치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입니다. 저는 통치의 품질을 높여 신뢰를 회복하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권위주의적이지 않으면서, 국민의 신뢰를 획득할 수 있는 고품질의 통치.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가 우리 정부와 행자부의 고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