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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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黃鉉産, 1945년 6월 17일 ~ 2018년 8월 8일)은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이자 대학교수이다.

어록[편집]

  •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늠될 것만 같다.
    • 《밤이 선생이다》, 〈과거도 착취당한다〉
  • 이렇게 반문하는 아이의 생각은 질문자들의 요구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것이지만, 방문교사는 그 점을 인정하면서도 높이 평가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또는 학교가 요구하는 학습능력은 모자 쓴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준의 능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학교교육의 코드를 알아차리는 ‘눈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생각이나 의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와 대답의 각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토론식 수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학생이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드는 토론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 것이고, 각본에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더 큰 문제는 틀림없이 외국의 학습지에서 번역했을 저 질문의 말 자체에 있다. 방문교사는 “모자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요?”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어느 사람이 모자를 쓰고 있나요?”라거나, 최소한 “누가 모자를 쓰고 있나요?”라고 물었어야 한다. 코드의 바탕 자체가 문제라는 이야기다. 잘못된 코드는 잘못된 그만큼 더 강압적이다. 삶의 진실과 따로 노는 코드는 결코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밤이 선생이다》, 〈모자 쓴 사람은 누구인가〉
  • 드라마가 역사를 앞에 내세울 때는 그 역사의 승리를 되새기고, 그 좌절에서 승리의 약속을 발견하자는 것이다. 하나의 승리 앞에서, 또는 승리의 약속 앞에서 우리는 그 승리가 공정한 것인가를 묻게 된다. 말하자면 주어진 현실의 조건들을 제대로 지켰는지 묻는 것이다. 현실을 현실 아닌 것으로 바꾸고, 역사의 사실을 사실 아닌 것으로 눈가림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상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비겁하기 때문이다.
    • 《밤이 선생이다》, 〈상상력 또는 비겁함〉
  •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사람들이 좋은 소금을 산답시고, 우리 고향 마을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소금을 고르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이치다. 살아 있는 삶, 다시 말해서 죽음이 함께 깃들어 있는 삶을 고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좋은 식품을 고르기 위해서도, 사람 사는 동네에 이른바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고향 비금 사람들이 염전에서 장판과 타일을 걷어낼 때도 그런 용기가 필요했다.
    • 《밤이 선생이다》, 〈소금과 죽음〉
  • 우리에게서 군대 문제는 많은 모순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기는 쉽지 않다. 우선 막강한 힘을 가진 국가 이데올로기도 있지만, ‘누구나 다 겪는 고통’이라는 생각도 군대 문제를 의제로 내걸 수 있는 길을 막는다. 방위산업체 근무자나 이공계 대학원생들, 특별히 국위를 선양한 젊은 인재들에게 군 입대를 면제해 주는 정책도 사실상 의제화의 길을 막는다. 그러나 ‘누구나’가 실은 ‘누구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억눌렀던 의제는 가짜 의제가 되어 폭발한다.
    • 《밤이 선생이다》, 〈군대 문제〉
  • 그래서 몽유도원도의 관람은 일종의 순례 행렬이 되었다. 사람들은 반드시 몽유도원도가 아니라 해도 위대한 어떤 것에 존경을 바치려 했으며, 이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 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 특별하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끈기로 그것을 증명했다. 특별한 것은 사실 그 끈기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두텁고 불투명한 일상과 비루한 삶의 시간을 헤치고 저마다의 믿음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전리품이었기 때문이다. 아흐레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의 광장에 구절양장을 그린 긴 행렬은 이 삶을 다른 삶과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의 끈질긴 시위였다.
    • 《밤이 선생이다》, 〈몽유도원도 관람기〉
  • 어떤 부당한 일을 놓고 ‘그것은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도, ‘누구는 인삼 뿌리 먹고 누구는 배추 뿌리 먹나’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 두 말의 구체적 효과가 다르고, 그 앞에서 우리 몸의 반응이 다르다. ‘인삼 뿌리’와 ‘배추 뿌리’가 학술활동의 도구로 사용되기는 어렵겠지만, 어떤 첨단의 사고도, 어떤 섬세한 말도 이 뿌리들에 이르지 못할 때, 학문은, 적어도 인문학은, 죽은 학문이 된다. 이 사태를 사회적 비극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밤이 선생이다》, 〈영어강의도 사회문제다〉
  • 인간이 수수천년 사용해온 말 속에는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고통과 슬픔이, 그리고 희망이 들어 있다. 제가 쓰는 말을 통해, 그 길고 깊은 어둠 속에서 그친 적이 없이 빛났던, 그리고 지금도 빛나는 작은 불빛들을 저 광채의 세계와 연결하려는, 또한 그 세계가 드문드문이라도 한 뼘씩 가까워지는 것을 보았던 시인에게 30만원과 300만원의 차이 같은 것은 없다. 그의 용기는 당신이 한순간이라도 꿈꾸었던 세계가 허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로 결심한 사람의 용기이다. 어떤 파락호라도 그 용기를 욕되게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 《밤이 선생이다》, 〈30만 원으로 사는 사람〉
  • 어느 젊은 출판인이 교수신문에 칼럼을 기고하여, 근래 프랑스에서 발간된 인문학 서적들을 번역하는 일이 시급한데, 마땅한 번역자를 구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그 까다로운 문장을 읽어내고, 그 의미를 깊이 파악하고, 그것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연결지어, 이 서적들을 번역해낼 만한 소수의 사람들은 저 모욕적인 질문을 자주 받으며, 제 공부의 터전에 위기까지 느끼면서 노력해온 사람들이다.
    • 《밤이 선생이다》, 〈불문과에서는 무얼 하는가〉
  • 나는 전쟁이 무섭다. 오만과 증오에 눈이 가려 심각한 것을 가볍게 여길 것이 무섭다. 전쟁을 막을 지혜와 역량이 우리에게서 발휘되지 못할 것이 무섭다.
    • 《밤이 선생이다》, 〈나는 전쟁이 무섭다〉
  • 이 유례없는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조금씩 지쳐 있다. 그렇더라도 마음이 무거워져야 할 때 그 무거운 마음을 나누어 짊어지는 것도 우리의 의무다. 엄마가 아이를 키우듯이, 나라 잃은 백성이 독립운동 하듯이.
    • 《밤이 선생이다》, 〈마음이 무거워져야 할 의무〉
  • 훌륭한 정치가 지배의 악몽을, 풍요의 경제가 빈부의 악몽을, 문명전달의 이기인 교육이 제도의 악몽을 벗어나지 못할 때, 예술활동을 근간으로 하는 창의적 문화는 문명제도를 자연과 같은 것이 되게 하고, 자연을 인간과 소통하게 하여 그 악몽과 상처를 다스리고, 모든 감각을 동시에 살아 움직이게 하여 이성과 상식과 교양을 근본적으로 혁신하고 드높인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동양에서 서양까지, 섬에서 대륙까지, 신화시대부터 현재까지, 현실을 예술로 바꾸고, 예술을 다시 현실로 바꾸어온 인간의 창의와 노력이 정치와 문화, 자연과 과학, 교육과 학습, 개인과 국가, 삶과 죽음의 이분법을 미래지향적으로 극복해온 역사에 대한 유장하고도 긴장된 진술은 파란만장한 연애소설보다 더 관능적이다. 그 국면 하나하나가 간절하고, 간절한 만큼 풍요롭다. 다시 말해서 새롭다.
    • 《밤이 선생이다》, 〈역사는 음악처럼 흐른다〉
  • 우리는 너무나 많은 폭력 속에 살고 있고, 그 폭력에 의지하여 살기까지 한다. 긴급한 이유도 없이 강의 물줄기를 바꿔 시멘트를 처바르고, 수수만년 세월이 만든 바닷가의 아름다운 바위를 한 시절의 이득을 위해 깨부수는 것이 폭력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고속도로를 시속 160㎞의 속도로 달리는 것도 폭력이고, 복잡한 거리에서 꼬리물기를 하는 것도 폭력이다. 저 높은 크레인 위에 한 인간을 일년이 다 되도록 세워둔 것이나, 그 일에 항의하는 사람을 감옥에 가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너는 앞자리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폭력이 폭력인 것을 깨닫고, 깨닫게 하는 것이 학교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처방이다.
    • 《밤이 선생이다》, 〈폭력에 대한 관심〉
  • 시인이 제 몸을 상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 《밤이 선생이다》, 〈시가 무슨 소용인가〉
  •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만들어준다. 어떤 사람에게 현재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겠지만, 또다른 사람에게는 연쇄살인의 그 참혹함이, 유신시대의 압제가, 한국동란의 비극이, 식민지 시대의 몸부림이, 제 양심과 희망 때문에 고통당했던 모든 사람의 이력이, 모두 현재에 속한다. 미학적이건 사회적이건 일체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한 인간이 지닌 현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에 의해 가름된다.
    • 《밤이 선생이다》, 〈윤리는 기억이다〉
  • 민중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 지적 상태와 정신 상태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말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어려운 말은 물론 지식인이 만들어내고 학문이 만들어낸다. 학문의 어떤 부분에 어려운 말을 많이 써야 한다면 그 부분이 민중과 멀어지는 것이 사실이겠으나, 그 학문 전체를 놓고 본다면 민중과 만나는 부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민중과 멀어진다고 해서 그 부분을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자각되지 않는 말들이고 진실과 부합되지 않는 말들이고 인습적인 말들이지, 반드시 어려운 말이 아니다. 어려운 말은 쉬워질 수 있지만, 인습적인 말은 더 인습적이 될 뿐이다. 진실은 어렵게 표현될 수 있고 쉽게 표현될 수도 있다. 진실하지 않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진실이야말로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것에 속한다. 장 주네는 "자신이 배반자라고 여겨질 때 마지막 남아 있는 수단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의미하는 바도 아마 이와 관련될 것이다.
    • 《밤이 선생이다》, 〈어려운 글 쉬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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