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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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양 초상화
박중양, 1910년 무렵

박중양(朴重陽, 1874년 또는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일본과 대한 제국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의 관료, 사상가이다. 본관은 반남이다. 1900년 일본 유학, 아오야마학교와 도쿄부기학교를 졸업했고 귀국 후 관리서 주사로 임용되어 대구군수, 경북관찰사, 전남관찰사, 충남관찰사 등을 지냈다. 한일합방 뒤에도 계속 공직에 남아 있으면서 충청남도장관, 중추원참의, 황해도지사, 충북도지사, 황해도지사 등을 지냈다.

그뒤 중추원칙임참의에 두번 재임되고 중추원고문, 부의장 등을 거쳐 1945년 일본 귀족원의원을 지냈다. 조선귀족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일제강점기의 신념적 친일파 중 한 사람이다.

어록[편집]

  • "혁구개신(革舊改新, 옛 것을 고쳐 새 것으로 만든다)[1]"


  • "두뇌가 공허하여도 아는 체 하는 것이 조선인들의 병이다.[2]"


  • "자신감도 능력도 없는 자가 사람들을 비판, 악평 잘하는 것이 조선인의 버릇이다.[2]"


  • "조선인의 악벽은 편협성, 배타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이다.[3]"


  • "편협성, 배타성, 다른 사람 험담, 나태, 의존 생활, 놀고 먹기가 조선인들의 악벽이다.[3] 형제숙질에게 의존하는 생활을 당연지사로 알고, 무위도식이 조선인들의 결점이다. 사돈의 8촌에게까지 기식(기생하여 사는 것)을 수치로 모른다는 풍자적인 속담도 있다.[4]"


  • "한국인은 하루에 한 번 이상 다른 사람 욕설, 험담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 "김옥균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해에 나가게 되어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은 김옥균의 시체가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종로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였다. 이런 짓은 야만인들에게도 없을 것이다.[2]"



  •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만큼만 노력하고 큰 결과물을 바라는 것은 망상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만큼의 노력하지 않았으면서도 불평불만을 품는 자들이 많다."


  • "대구부의 성이 오래되어 토석(土石)이 곳곳에 붕괴되어, 다니는데 방해만 되고 심히 위험하온데, 곧 성첩을 철거할진대 성벽을 허물어 도로를 내어 자연스레 대구의 주요 시설물로 만들고자 하오니 대구부청이 이를 주관케 해 주시고 이 사업을 실행케 하고자 조정에 보고하오니 소상히 판단하셔서 처분을 내려주시기를 기다립니다
    -1906년 10월 경상북도관찰사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5]"


  •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신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것 외의 것이 아니었다.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6]"



  • "국가가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국가에는 충성할 이유가 없다"


  • "이완용을 매국노라고 독언하지만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쉬우나, 국가의 위급이 존망한 떄의 당면한 책임자를 선처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난을 당하여 자살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사상계의 자극은 될 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이다.[2]"


  • "이완용은 시대가 낳은 피해자요 희생자였다."


  • "조선인들은 머리가 텅 비었어도 잘난척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못된 습성을 갖고 있다."


  • "조선인들은 나는 깨끗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만 깨끗함, 착함과 선량함을 요구한다"


  • "조선총독부에서 정치의 개선과 인재 등용을 세인이 모두 아는 바이다. 정령에 이론에 편중하고 민중 생활에 불합리한 점은 없었으되, 대체 정치의 목표가 민생의 복리를 계획하는데 있고, 관공리 등은 일일이 시무가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이외에 한 것이 전혀 없다.[3]"


  • "자제단은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자제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6]"


  • "일제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은 일본인들에 대한 편견이 작용하는 결과다"


  • "암흑시대 조선이 현대 조선으로 개신된 것은 세인이 모두 아는 바다. 조선인의 고혈을 흡취하였다고 일정시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만을 적대시한 데서 헛소리한 편견이다.[3]"


  • "(어떤 것을 평가할 때) 염두의 증오지심이 있어서는 공정한 평론이 아니되는 것이다.[3]"


  • "기대하지 않는다면 실망하지도 않는다"

주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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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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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제의 길은 항일 투쟁의 길이었다 데일리안 2010.02.06
  2. 2.0 2.1 2.2 2.3 2.4 2.5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 9권》(민족문제연구소, 1996) 15페이지
  3. 3.0 3.1 3.2 3.3 3.4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 9권》(민족문제연구소, 1996) 16페이지
  4.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 9권》(민족문제연구소, 1996) 17페이지
  5. 1906년 10월 조정에 장계로 보낸 대구읍성 철거 보고서
  6. 6.0 6.1 "일제가 현대 조선 개신" 해방후에도 망발…친일파 박중양 매일신문 2010년 01월 25일자